경제&인물 / / 2023. 1. 27. 15:13

루이비통 탄생 그리고 명품브랜드가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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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브랜드인기가 얼마나 좋을까요?

이 브랜드 때문에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장녀 호텔 신라 이부진 사장 그리고 고 신격호 회장의 장녀 신영자 전 이사장이 대결을 벌였었어요. 
이 브랜드 매장을 자기네 면세점에다 유치하려고요. 이부진 사장이 직접 나서서 이 그룹 회장을 영접하고 공을 들여서 유치에 성공했는데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인천공항 면세점 이 브랜드 매장 한 곳에서 개장 첫 해에만 1천억원 넘는 매출이 나왔어요. 
중국인들이 많이 사는 줄 알았는데 한국 사람들이 엄청 많이 샀어요. 

혹시 그런 브랜드 생각나는 거 있어요?
저건 엄마 아빠나 할머니 할아버지 쓰는 거지 그러다가 갑자기 젊은 층이 열광하게 되는 그런 거 있어요?
이게 과연 가능한 건가 싶은데 이 브랜드가 그 비결은 뒷부분에 설명드릴게요. 아무튼 그러면 명품 중에서 브랜드 가치가 제일 높은 기업 아니 세계 전체 패션 기업 중에서 브랜드 가치가 가장 높은 데는 어딜까요? 
에르메스 아니고 구찌도 아니고 샤넬도 아닙니다. 
이 브랜드가 나이키와 엎치락 뒤치락해요.

 

 


수많은 명품 브랜드 중에서도 가장 높은 매출을 올려서 재작년 추정 매출이 연 18조 원 정도 돼요. 
아마 프랑스 사람들 중에서 제일 유명한 이름 중에 하나가 이 브랜드 창업자 이름 아닐까 싶어요. 

이 브랜드 쓰는 셀럽들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너무 많고요 한 때 3초 백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 브랜드 핸드백에 3초마다 한 번씩 보인다고 해서 짝퉁도 이 브랜드가 제일 많아요. 

피티기는 암투로 브랜드의 주인이 바뀌면서요. 
이제는 세계 최대 명품 그룹을 떠받치고 있는 브랜드, 그래도 계속 많이 팔리고 있는 세계 최고 최대의 명품 브랜드, 166년 역사의 루이비통입니다.


1836년 루이비통의 창업자 루이비통이 16살에 파리에 도착합니다. 
프랑스와 스위스 접경지대에 있는 프랑스 앙쉐라는 지역에 있는 집을 떠나서 파리로 일하러 간 거죠. 


지금 찾아보니까 안 쉬고 가도 차로 다섯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거든요. 
근데 이걸 걸어갔어요. 돈 떨어지면 일하고 또 돈 떨어지면 일하고 또 걸어가고, 기록마다 다른데 최소 1년 넘게 걸린 것 같아요. 


파리에 도착해서는 마레샤이라는 여행용 트렁크 제작자의 수습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17년을 일하거든요. 주로 부자나 귀족들이 마차나 기차, 배로 여행할 때인데 이 여행객들의 트렁크를 만들고 짐도 싸주고 하는 일을 한 거예요. 
아주 솜씨가 야무졌던지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의 아내죠 외제니 황후에 트렁크를 만들고 짐도 싸주게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1854년 독립해서 자기 이름을 건 가게를 차리죠 이게 루이비통 브랜드의 시작이었습니다.


연예인 트렁크로 유명한 리모와 있잖아요. 
그거 역시 루이비통이 소속된 lvmh그룹 소속인데 아무튼 지금은 여행용 트렁크가 어때요 어떤 모양이에요? 보통 직사각형 형태잖아요. 가볍게 만들려고 하고.

 

그런데 당시에는 여행용 트렁크가 나무나 가죽으로 만들고 윗부분은 좀 둥근 그런 형태였어요.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보석 상자 같은 거.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 자료를 찾아보니까요. 한 미국의 골동품 경매 업체는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여행 가려면 짐들을 쌓아놔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운이 안 좋아서 자기 여행용 트렁크가 맨 밑에 깔리면 내용물도 부서질 수 있고, 가방도 부서질 수 있다는 거.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것이 밑에 안 깔리게 하고 맨 위에 두려고 위를 둥글게 만들었다"
이런 설명을 하더라고요. 미국 골동품 경매업체 또 다른 설명은 비가 오거나 물이 위에 있을 때 흘러내리게 하려고...

아무튼 근데 계속 그런 트렁크들만 생기니까 쌓기가 힘들어질 거 아니에요. 

그랬는데 루이비통이 방수 처리한 캔버스 재질에 직육면체 모양의 여행용 트렁크를 만듭니다. 
루이비통의 트렁크는 가벼웠고 또 여러 개 쌓기도 좋았고요. 프랑스 황후 가방을 만들어주는 사람이잖아요. 
여행을 다니는 부유층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면 현재 짝퉁이 가장 많은 명품 가방은 어느 브랜드일까요?
짝퉁 명품 가방의 절반 이상이 루이뷔통을 따라 한 거다. 이런 조사 결과도 있어요.
그런데 이게 옛날부터 그랬습니다. 1800년에는 짝퉁이 옛날에도 있었어요. 솜씨는 달랐겠지만 비슷하게 만들기는 그렇게 어렵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2세 경영에 들어간 루이비통 아들 이름이 조르주였어요. 
조르주비통은 모조품을 막기 위해서 트렁크에다가 무늬를 입히기 시작해요 처음엔 줄무늬였고요 1888년에는 다미의 체크무늬죠. 그리고 1896년에는 드디어 루이비통의 엘과 브이를 겹친 지금의 모노그램 무늬가 탄생합니다. 


그런 와중에 도난 방지용 잠금장치도 개발했거든요.
그리고 탐험가들이 주문을 하니까 내구성을 직접 테스트하겠다고 그 아들이 막 들고 사막을 건너가고 그러기도 했어요. 

 

그리고 이후에는 샤넬의 가브리엘 코코 샤넬이 직접 주문해서 만들었다는 알마백 이게 나중에는 일반에 판매되죠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하죠? 샤넬이 루이뷔통한테 내 가방 좀 만들어죠 그 루이비통 가방 들고 다녀요. 그건 마치 스티브 잡스가 갤럭시 쓰는 거랑 비슷한...


그리고 시대의 연인 오드리 헵번이 좋아해서 자기 몸에 맞는 작은 사이즈를 특별 주문해서 들고 다녔다는 스피디백 이게 그 삼초 백으로 유명한 거예요. 시내나 강남 같은 데 가면 막 3초마다 하나씩 보인다는 거죠. 


이렇게 여행용 트렁크 위주로 제작하던 루이뷔통이 자동차 여행이 대중화되면서 에르메스 같은 다른 명품 브랜드처럼 손가방이나 여행용 가방 이런 거 만들면서 큰 인기를 끕니다. 
그렇게 로이비똥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 최대의 여행용 가방 업체로 성장하죠.

그리고 비통가문 3세 경영에 들어가서는요. 파빌론백, 빠삐용백이죠. 
이런 거 등등해서 제품 라인업이 더 다양해졌고요. 특히 전후에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던 일본에서 특히 인기가 많았어요.  
일본에서는 공공연하게 루이비통 들고 다니는 게 성공의 상징이다. 이런 얘기가 있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해외여행 가는 족족 루이비통을 구매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판매량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루이뷔통이 아주 크게 확장하지는 못했습니다.
매장 수도 적었고 60년대나 70년대 초반 같은 시절에 파리에 가서 루이비통을 살려면 줄을 두 시간 이상 서야 하는 것도 다반사였대요.

 

바로 이시절에 창업자 그의 아들 그의 손자로 이어지던 가족 경영에 약간의 변화가생깁니다. 

1977년에 철강 유통사로 수환을 발휘하던 창업자 증손녀의 남편이죠. 앙리 라카미에가 그룹의 키를 잡습니다. 
그래도 가족 경영은 가족 경영인데 조금 변화가 생긴 거죠.

라카미에는 아주 공격적인 사업가였어요. 
그리고 사위였지만 그 집안 집계들보다 루이비통이라는 이름의 잠재력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어요. 
북미시장에 공을 들였고요 1978년에는 일본에 매장을 엽니다. 그리고 84년에는 한국에도 진출하는 등 아시아 시장도 공략하죠. 


음악회나 전시회 요트 경기처럼 부유층이 즐기는 문화 이벤트의 후원을 강화합니다. 이 시절에 매출과 회사 규모가 전보다 급성장하죠.


그런데요. 창업자 아들에서 사위로 경영의 축이 옮겨가는 변화가 있었고 회사도 커졌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루이비통은 종합적인 명품 업체가 아니라 명품 여행용 가방 핸드백 만드는 가방 업체였습니다. 

 

그럼 루이비똥이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갖추게 되는 진정한 변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언제냐? 비통가문의 패밀리 비즈니스였던 루이비통의 주인이 바뀌면서부터입니다. 

앞부분에 호텔 신라 이부진 사장이 어떤 사람한테 공을 들였다고 했잖아요. 
lvmh의 아르노 회장이었거든요. 캐시미어 코트를 입은 늑대라는 별명을 가진 바로 그 사람이 변화를 설계한 주인공이었어요. 


1987년에요. 샴페인 와인 꼬약 등을 만드는 주류 업체 모에 헤네시 그룹이 루이비통한테 손을 내밉니다. 
우리 가문의 지분이 너무 적으니까 너네랑 손을 잡아서 좀 안정적인 경영을 그래서 아주 금방 두 그룹이 합쳐집니다. 
루이뷔통 모에 헤넷이 지금의 lvmh 그룹이 만들어진 거죠. 
그러고 나서 1988년에서 시작해서 1989년까지 아주 많은 진통 끝에 이 lvmh 그룹의 경영권이 디올를 갖고 있던 베르나로 아르노에게 넘어갑니다. 

근데 왜 아르노가 중요하냐? 아르노가 왜 루이비통의 변화를 설계한 주인공이라고 말씀드렸냐면요. 
아르노 자신은 경영자였지만요. 그 누구보다 관습을 거부하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가진 디자이너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디자이너나 셀럽들이 돈 벌면 변해가지고 예전과 같은 어떤 창조성을 발휘하지 못한다는데  그런데 그런 소수의 특별한 창조적인 디자이너 같은 사람들은 돈을 벌어도 변하지 않는다고 봤던 거예요. 


이게 왜 중요하냐? 명품 기업 소비자는 주로 돈이 많은 사람들일 거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돈 많은 이미지 이런 게 아닌 거예요. 
그런 고객들은 자기도 이미 돈이 많기 때문에 그런 특별한 디자이너들이 주게 되는 이미지나 캐릭터에 끌린다는 거예요. 

아르노가 이렇게 봤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아르노 회장이 전 직장에서 쫓겨난 한 천재 디자이너에게서 그런 특별함을 발견합니다. 천부적인 재능과 노력으로 이미 20대에 페리 엘리스에 영입됐지만요 관습을 깨고 이미 90년대 초반에 스트립 패션과 하이패션을 접목 시켜 그런지룩을 선보여서 미디어와 젊은층한테 엄청난 환호를 받고 관심이 쏟아졌는데 보수적인 경영진의 마음을 사지 못해서 회사에서 쫓겨난 마크 제이콥스였습니다. 

요즘은 일종의 관종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그때 이미 아주 특별한 대단한 능력 있는 관종이었던 거예요. 
뭘 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특이한 행동을 하고, 옷 벗고 부츠만 신고, 사진 찍고, 디자인 잘해서 상도 엄청 많이 받는데 열심히 노력하고 사는 것도 좀 특이하고, 외모도 훌륭하고, 이런 모든 탁월한 성취는 물론이고 그 캐릭터로 인해서 사람들을 주목하게 만들었어요.

어느 정도였냐면요. 왜 가위손이라는 영화 봤어요? 위노나 라이더라는 사람이 있거든요. 

근데 그 위노나 라이더가 안타깝게도 도벽이 있었습니다.  근데 마크 제이콥스의 드레스를 훔친 거예요. 
엄청 망신을 당하고 완전히 파묻혔을 거 아니야? 매장당했을거 아니냐? 아니에요. 


마크 제이콥스가 그 뒤에 어떤 대응을 했냐?  위노나 라이더를 마크 제이콥스 브랜드의 모델로 기용한것입니다. 훔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화을 복으로 바꿀 만큼 창조적이고, 능력이 있고, 매력 있는 주목을 받는 인물이었던 거예요.

그렇게 루이뷔통에 도착한 마크 제이콥스는요 기성복 라인을 처음에 담당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어떤 평론가는요 마크 제이콥스가 디자인한 옷을 입으면 일단 눈에 띄는데 그러고 나서는 옷이 보이는 게 아니라 사람이 보인다. 
특히 매일 새벽까지 놀고 마시고 했던 마크 제이콥스가 바로 그런 젊은이들이 노는 장소에 젊은이들이 뭘 입고 가고 싶어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런 얘기도 들어요.


그리고 기존의 가방들 왜 루이뷔통을 아주 비하하는 사람들은 똥 가방이라고도 표현하거든요. 
늘 비슷해서 젊은 세대들은 좀 지루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모노그램 갈색 이런 거잖아요. 
이 가방에다가 막 에나멜 코팅한 소재를 도입하고 베르니 라인이죠. 
무라카미 다카시등과 콜라보에서 아주 밝은 느낌의 제품들을 생산해 냅니다. 
이런 것들이 뭐 초대박을 쳤습니다.

특히 이렇게 마크 제이콥스는 콜라보의 등에서 카니 웨스트 다프트 펑크랑도 협업을 했고요 새로운 바람은 물론이고 이 바람을 매출액까지 연결시켜서 아주 보수적인 기존의 명품 업체들의 콜라보 열풍을 시작시켰다 이런 평가를 받아 마크 제이콥스 시절의 루이뷔통이 명품 가방 업체에서 종합 명품 브랜드로 우뚝 서게 된 거죠. 
lvmh 그룹의 아르노 회장의 배팅이 성공한 겁니다.


마크 제이콥스는 루이비통 브랜드를 너무 상업화시킨 것 아니냐? 이런 비판도 받지만 그가 있던 1997년부터 2013년 말까지 루이뷔통은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건 물론이고요 매년 최소 56%에서 10% 이상의 성공을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마크 제이콥스가 떠나던 2013년 말에 무려 매출이 95억 달러에 이른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크제이콥스가 떠나고 루이비통에는요 발렌시아가에서 모터백 열풍을 일으켰던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영입되고요 이렇게 변화가 계속돼서 2018년에는 오프 와이트의 버지라블로가 남성복 아트디렉터로 영입되는 데까지 온 거죠. 
그렇게 루비동 매출이 계속 증가해서 2018년 기준 18조 원 lvmh 그룹의 매출을 맨 앞에서 이끌고 있습니다.

너무 흔하고, 상업적이고, 프랑스가 아닌 지역에서 만들고, 가격도 계속 올리고, 이런 비판도 받지만요 루이뷔통은 166년 역사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변화를 계속 기민하게 하면서 현재까지 오고 있죠.

사람들은 계속 루이뷔통을 더 사고 더 원하고 있습니다. 


브랜드 가치가 샤넬과 에르메스, 구찌보다 높은 명품 기업 루이비통 앞으로의 행보도 눈여겨 볼만합니다.

 

 

에르메스 탄생 그리고 명품브랜드가 되기까지

명품 서열도라는 거 들어봤어요? 피라미드 같이 생긴 거 그 맨 꼭대기에 뭐가 있을까요? 남자는 시계 여자는 백이라는 말이 있어요.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브랜드 하나만 사도 1천만원이 모자

wonyo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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