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인물 / / 2023. 1. 26. 21:30

구찌의 탄생 그리고 명품 브랜드가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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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셀럽들이 가장 사랑하는 브랜드 구찌.

 

협찬을 안 해줘도 셀럽들이 막 사입고, 가수들은 노래도 만들고 최근 커피만 보내는게 아니라 378만원짜리 구찌 핸드백을 선물로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구찌가 젊은층한테 인기가 있다는 건데 이런 구찌가 옛날에는 아주머니 아저씨들 브랜드로 몰려서 망할 뻔했다는 것입니다.


구찌가 사고도 되게 많이 쳤어요. 인종차별적인 비판을 받는 의상도 만들었었고,  구찌 가문은 서로 가족끼리 싸우다가 아들이 아버지를 감옥에 보내기도 했고, 서로 죽인 적도 있어 구찌의 성공과 실패, 부활 그리고 막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구찌 1921년 이탈리아 피렌치에서 가죽제품 가게로 시작했어요. 


구찌는 16살 때 아버지랑 싸웠어요. 그래서 영국 런던으로 넘어갑니다. 
런던에서 당대 사교의 중심이라고 하던 사보이 호텔에서 접시 닦는 일, 벨보이 뭐 여러 가지 일들을 해요. 


어느정도 돈을 모아서 고향으로 돌아와 자기 가게를 차려요.

자기 이름을 내걸고, 근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위기가 닥칩니다.  구찌가 한창 가게를 꾸려나가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가 시작돼요.

다른 나라들이 이탈리아 수출을 막습니다. 당연히 가죽수입도 막혀요. 그런데 구찌는 가죽 가게라고 그랬잖아요. 
앞이 막막했어요.

그때 대체제를 찾아요. 나폴리산천 같은걸 모아서 특유의 문장을 넣고 리넨으로 된 가방을 만듭니다.

이게 처음으로 대히트를 칩니다. 위기가 기회가 된 거죠. 일이 잘 되니까 굳이 아들들도 가업에 뛰어듭니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다시 한 번 위기가 시작됩니다.

구찌의 뱀부백이라는 대나무 손잡이로 돼 있는 가죽 가방이 있어요.
한국에서는 전지현, 이영애백으로 유명했고요. 예전부터 유럽 왕족들은 물론이고 서양 셀럽들이 많이 사용했어요. 


구찌가 첫 히트를 치고 나서 로마까지 가게를 확장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집니다. 
아시다시피 이탈리아가 전쟁에서 지게됩니다. 그래서 물자가 모자라게 돼요. 특히 가죽도 부족해집니다. 보통 백 하면 소가죽 양가죽 이런 거 생각하잖아요. 가죽이 부족하던 이런 위기에 둘째 아들 알도가 아이디어를 냅니다. 


아빠 가죽이 부족한데 우리 돼지 가죽 한번 써보면 안 될까?
돼지 가죽이라는 게 모공이 되게 잘 보여요 그래서 겉에 보이는 패션 용품으로는 잘 쓰진 않아요. 그런데 물자가 모자라니까 발상의 전환이 된 거죠. 


그리고 일본산 대나무가 수입이 됐었어요. 이것을 손잡이에 쓰는 발상의 전환을 합니다. 
그렇게해서 일본산 대나무의 돼지가죽으로 만든 뱀부백이 탄생한 거죠. 이렇게 엄창난 인기로 2차위기에서 다시 한번 기회가 되고 구찌의 굿 시그니처 아이템 중에 하나가 됩니다.

 

지금 굳지 하면 떠오르는 녹색 적색 녹색 마크 알죠 그것도 뱀부백 히트에 힘입어서 밀라노의 매장을 확장하고 이때쯤 만들어집니다. 

1953년이었어요. 말의 재갈 장식을 구찌가 로퍼에 올리기 시작할 때쯤, 성공 가도를 달리던 구지가 드디어 미국 진출을 선언하고 미국 진출을 합니다. 


구찌가 16살에 처음에 돈을 벌러간 곳이 런던의 사보이호텔이라고 했잖아요. 56년 뒤에 처음으로 미국 매장을 낸 게 뉴욕의 사보이 호텔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어릴 적 꿈을 이룬 거죠. 그런데 미국 매장을 열고 나서 딱 보름 뒤에 구찌는 눈을 감아요. 

 

그러니까 눈을 감기 보름 전에 어릴 적 꿈을 이룬 거라고 볼 수 있죠 하지만 구찌는 자기가 세상을 떠난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마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거예요.


구찌에 재키 백이라는 유명한 가방이 있어요. 
전지현 재키백, 최지우 재키백 이렇게 불리는 구찌의 흥행 가도에 불을 당기는 이 백도 큰 역할을 했어요. 
근데 왜 재키 백일까 당시에 구찌가 모서리가 둥근 가방을 내놨어요. 


어깨에도 걸 수 있는 그걸, 당대 패션의 아이콘 미국 JF캐네디 대통령의 아내였던 데클린이 즐겨 메고 다닙니다. 
여기 갈 때도 메고 다니,고 공식 석상에도 매고 다니고,사적으로도 메고 다니고 패션의 아이콘 재키의 사진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사람들이 야 저 백 뭐야 해서 사기 시작해요.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아예 재키 백이라는 명칭이 붙었죠. 


이 가방에 한국에서 부자가 재벌 되,고 많이 성공하고 돈 되게 많이 벌면 자식들이 어떻게 되죠? 싸우잖아요. 

그리고 재벌 2세에게 또 자식이 생겨서 3세가 생기면 2세 때 안 싸웠더라도 3세 때 분명히 싸웁니다. 보통 거의 싸워요. 구찌 가문 2세, 3세들도 싸웠습니다. 


런던, 파리 ,도쿄, 홍콩 구찌가 매장을 확장하고 엄청나게 계속 성공을 했는데, 구찌가 승승장구하던 이 시절에 후손들이 엄청나게 싸웠어요. 


지금도 구찌 짝퉁이 굉장히 많잖아요. 근데 이 집안은 심지어 지들끼리 싸우다가 가족 중에 한 명이 짝퉁을 지가 만듭니다. 
파울로 구찌라고 한국에서도 팔린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안 보이는데, 도대체 왜 그랬을까? 이런 사연이 있어요. 


구찌에게 다섯 명의 자식이 있었습니다.
창업자 구찌의 아들 두 명이 경영에 참여해요. 둘이 싸웁니다. 그리고 손자들도 경영에 참여했는데 같이 싸워요. 


그 과정에서 파울로라는 손자가 쫓겨나고 열받아 자기 이름을 따서 파울로 구찌를 만듭니다. 
구찌는 구찌잖아. 나도 구찌인데 그래서 만들었어요. 그리고 일반 구찌보다 싸게 팔았어요. 명품이었던 구찌의 가치를 파올로 구찌가 떨어뜨린 거죠. 그래서 아버지가 말렸어요.
적당히 해라 가족끼리 싸우는데 이 정도만 하자 했는데 아들이 아버지를 탈세 혐의로 신고해 버립니다. 
아버지가 실제로 81살의 감옥에 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4년 뒤에 세상을 떠납니다.

이러한 다툼 끝에 결국 3세였던 마우리치오 구찌가 경영권을 잡습니다. 


여기서 잠깐 톰포드라는 디자이너 들어봤죠. 
구찌를 살려낸 전설의 디자이너라고 평가받는 톰포드인데 가족간의 다툼이 어떻게 보면 톰포드를 불러낸 전화위복의 계기가 돼요. 가족은 싸웠지만 브랜드는 살아나는 거죠. 

이 부분은 막장 스토리 하나 더 가고 그다음에 얘기할게요

 

 

혹시 한국에서 사람들이 다아는 재벌 총수가 갑자기 암살당해서 죽으면 얼마나 충격적이겠어요?

그런데 구찌 왕조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경영권을 잡았다고 했던 마우리치오가 구찌 가문 3세가 1994년에 자기 지분을 바레인계 투자회사였던 임베스트코비라는 회사에  매각했어요. 완전히 매각했는데 가족 경영 시대가 끝난 거죠.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95년 3월 27일 아침 8시 30분 마우리치오 구찌가 밀라노에있는 자기 사무실로 출근을 하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네 발의 총성이 울립니다. 
세 발은 등에 한 발은 머리에 맞고 사망합니다. 이 일은 이탈리아는 물론 전 세계 패션계가 경악에 빠집니다. 그리고 심지어 범인도 드러나지 않았어요. 


누가 죽였을까를 사람들이 궁금해했는데 그로부터 2년 뒤에 마오리치와 12년 동안 살았던 전부인 파트리지아가 암살자를 고용해서 전 남편을 죽였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아니 왜 죽였냐 물었더니 그랬어요. '이혼 합의금이 너무 적었어 콩 한 접시만큼도 안 됐어요.'


하지만 더 충격적인 건 그 뒤에 드러났습니다. 파트리지아가 16년 동안 살고 감옥에서 나왔거든요.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니까 출소할 때 기자들이 기다렸어요. 
그리고 나오는 전 부인에게 물어봤습니다. 왜 암살자를 고용했어요? 직접 죽이지 않고? 그랬더니 전부인 파트리지아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시력이 안 좋아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거든 구찌한테는 내가 필요했어 난 아직도 내가 구찌 일가라고 생각해 내가 진짜 구찌야 근데 전 남편이 내 말 안 듣고 기업을 팔아버렸어 멍청한 짓이었어. 그런데 제일 열받는 게 뭔지 알아? 내가 그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

 

그렇게 구찌 왕조는 3대를 못 버텼죠. 그 사이에 회사는 굉장히 휘청거렸습니다. 
다들 굳지는 끝났다고 했어요. 실제로 파산 직전까지 갔고요


그런데 가족들 간의 싸움이 전화위복이 되면서 톰포드가 등장했다고 했잖아요. 
파격적인 디자인과 콘셉트 광고로 유명한 사연은 이렇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탈세 혐의로 신고했잖아요. 그때 아버지가 세금 전문 변호사를 고용합니다. 


하버드 로스쿨 출신의 도미니코 드솔레 이 양반이 마음에 들었는지 1984년에 구찌 일가가 드솔레를 구찌 아메리카로 스카우트해요. 그리고 1994년에 구찌 가문한테 인베스트코이라는 회사가 지분을 샀다고 했잖아요. 구찌 가문 사람들 다 물러나니까 ceo에 앉힐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드솔레를 ceo로 안칩니다.

그런 드솔레가 ceo가 되자마자 드솔레가 가장 먼저 한 일이 톰포드를 수석 디자이너에 앉히는 거였습니다.
파격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톰포드가 누구야? 웬 톰포드야? 그랬어요. 


유명 디자이너 데려와야 되는 거 아니야 근데 실제로 톰포드는 33살에 불과했고 건축 전공에다가 미국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커리어를 패션계에서 정통으로 시작한게 아니라 패션 회사의 홍보 업무로 시작했어요.

말단직으로하지만 톰포드는 18시간씩 일하는 워커홀릭이었고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그걸 드솔레가 알아본 거죠. 구찌 일가에서 사실은 톰포드를 계속 쫓아내려고 했어요. 그때마다 드솔레가 톰포드를 계속 지켜냈습니다. 그리고 결국 기회가 오니까 발탁한거였다.

그리고 드솔레가 얘기합니다. 포드한테 "포드야 우린 돈이 없어, 하지만 우리는 구찌라는 거대한 이름을 갖고 있잖아" 이거 영화 대사 같잖아요. 톰포드는 드솔레가 했던 얘기를 완벽하게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패션에서 미디어의 중요성을 완전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지휘했던 1995년 봄 시즌 쇼에서 톰포드는 한 방에 보여줬습니다.


구찌가 달라지고 살아났다는 그때 톰포드가 뭐라고 했냐면요. 
"하이힐은 더 높아질 수 없을 만큼 높게, 짧은 치마는 더 짧아질 수 없을 만큼 짧게" 엄청 자극적이고 대담한 의상을 내놨습니다. 


성적인 매력을 극대화시켰다. 너무 자극적이라는 비평도 있었지만 일단 미디어가 즉각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과거에는 미디어가 묻지는 중년용이다. 그래서 상대도 안 하고 거들떠 보지도 않았었거든요.

그런 구찌를 해피나 셀럽들이 자기 돈으로 구찌를 사 입기 시작한 거예요. 
심지어 마돈나 같은 경우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구찌로 하고 mtv 어워드에 나타나기도 했어요. 
드솔레와 톰포드가 등장한 지 단 1년 만에 구찌는 완전히 살아났습니다. 


구찌를 인수했던 인베스트코이 처음에는 구찌 때문에 우리까지 망하겠다. 이렇게 얘기를 했었거든요. 근데 처음에 4억 달러를 투자한 게 2년 만에 20억 달러로 5배나 불어났습니다. 


근데 우리도 그렇지만 누가 잘 나가면 어때요 견제가 막 들어오잖아요. 
그때 당시에 부지가 계속 잘 나가기 시작하니까 루이비통 모에 헤넷 lvmh라는 세계 최대의 패션 그룹이 구찌 주식을 야금야금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적대적인 인수합병을 시도한 거예요. 루이뷔통, 디올. 지방시, 셀린네 같이 큰 브랜드를 보유한 lvmh가 구찌까지 먹으려고 했어요

이때 ceo 드솔레가 한 일이 lvmh의 가장 큰 경쟁자였던 ppr 그룹 발렌시아가, 생로랑, 보테가메네타 등을 보유한 지금의 케어링 그룹인데요. 케어링이랑 손을 잡으면서 구찌 브랜드를 지켜냈다. 이런 평가를 받습니다.

 

 왜냐면요. 구찌가 lvmh에 팔리면 루이뷔통 아래로 취급받을 수 있는 거였어요. 근데 ppr이랑 손을 잡으면 덩치는 커지는데 구찌가 그룹에서 1등이 될 수도 있거든요. 실제로 작년 상반기에 케어링 그룹 매출이 10조 3천억 원 정도 되거든요. 
그중에 60%를 구찌가 책임집니다. 케어링의 대표 선수가 된 거죠.

드솔레와 톰포드가 구지를 떠난 2004년 이후에도 구찌는 계속 성장을 거듭합니다. 
그러다가 2013년부터 주춤한 기색이 역력해졌습니다. 사람들이 구찌에 실증을 내기 시작한 거죠. 


그리고 2014년 말 새로 부임한 구찌 ceo 마르코 비자리는 구찌안에서 12년 동안 일하면서 무명에 가까웠던 디자이너 알렉산드로 미켈레를 최고 디자인 책임자에 발탁합니다.

사람들이 당연히 놀랐죠. 왜 유명한 사람 안 써요? 무슨 미켈레가 누구예요?
나중에 이렇게 얘기했어요. ceo가 "제 입장에서는 오히려 가장 안전한 결정이 유명한 디자이너 쓰는 거였어요", "저는 누구보다 노멀한 사람을 원했어요"

 

근데 알렉산드로 미켈레 사진을 보면 아실 거예요. 머리도 길고 좀 특이하거든요. 이 사람이 제일 안 넘어간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이 들 수있어요. 

근데 비자리는 이렇게 설명했어요. 
'자기가 말한 노멀이라는 거는 정상적으로 잘 교육받고 사람들이랑 소통을 잘하고 잘 지내고 굳이 내부를 이해하고 조직과 소통할 수 있는 무엇보다 미켈레가 뱀, 벌이 나오고 마크 커지고 아무 맥락 없이 독특한 디자인을 내놓은 것 같지만 사실 그게 국제 아카이브에서 다 끌어온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죠'


그리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겁니다. 독특하지만 설명할 수 있는 디자인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이라는...
실제로 알렉산드로 미켈레는 구찌의 장구한 아카이브에서 특정한 코드를 끌어내서 브랜드를 완전히 재창조했다. 이런 평가를 받습니다. 

 

톰포드가 극단적으로 성적인 매력을 강조했다면 알렉산드로 미켈레는 젠더리스 패션을 도입합니다. 
그래서 성공하죠. 밀레니얼 세대가 특히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고요 이제는 디지털 채널 강화하고 아예 계절과 상관없이 패션을 내놓겠다. 이런 얘기까지 하고 있죠

구찌의 스토리에는 브랜드를 만든 창업 가문의 성공과 실패 막장 드라마 그리고 무엇보다 이름은 없지만 재능 있는 디자이너들 그리고 그걸 알아봤던 경영진들의 판단력이 담겨 있습니다. 


앞으로 굳지는 어떻게 될까요. 이걸 지켜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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